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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디자이너 VS 그래픽 디자이너
Design | 10/09/12 17:11
야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린다. 불길한 예감, 회사다. “여경씨, 다시 들어와야겠는데” 나는 되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수화기 너머 선배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서해에서 배가 침몰하고 있대” 그날 밤 천안함이 침몰했다.
그 당시에는 배가 가라않는 시간도 있고 가까운 바다고 해서 뭐 그리 큰 일 있겠나 싶었다. 그러나 다음날 ‘46명 실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천안함 침몰은 끔찍한 현실로 바뀌었다.
어김없이 나는 천안함 그래픽을 맡았다. 정부는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고 그래픽에 필요한 자료는 전무했다. 상황 사진은 그렇다 치고 마땅히 있어야할 천안함 사진조차 없었다. 관련 사진이 없는 상황에서 기사의 신뢰도를 위한 이미지적 근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래픽만으로 상황을 예측해 사건을 사실처럼 재구성해야 했다. 3D프로그램을 다루는 후배가 배 모형을 만들었고 사막과 바다 사진을 합성해 천안함 침몰 상황을 연출했다. 각종 구조선, 구조 현황 등 매일 들어오는 상황을 체크해 그래픽을 만들어 나갔다.
침몰원인에 대한 추측들도 난무했다. 침몰원인이 ‘어뢰냐 아니냐’ 어뢰라면 ‘북한의 것이냐 아니냐’로 좁혀지고 있었다. 보수언론은 북한의 어뢰로 진단하고 논리를 전개해 나갔다. 진보언론은 보수언론의 논리를 반박하거나 다른 가능성을 찾는 등 대립각을 세웠다. 언론들은 ‘사실 보도’를 표방했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적 논리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 역시 진보언론에 소속된 디자이너로서 그래픽을 통해 이 게임에 동참하고 있었다.
2010년 4월은 천안함 사태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잇따른 인명사고와 침몰원인에 대한 의혹들은 일상의 이슈가 되었다. 이 때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였다. 언론들은 천안함 사태가 선거에 미칠 영향을 조심스럽게 진단했다. ‘전쟁’이란 단어도 공공연히 등장했다. 한명숙의 검찰 수사, 안상수 의원을 둘러싼 불교계 갈등, 무상급식 등 선거에 영향을 줄 만한 굵직한 사건들은 천안함의 그늘에 철저히 묻혔다.
정부의 침몰원인 발표 이후에도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은 보수언론의 논리로 귀결되고 있었다. 당시 난 조금 억울하고 흥분된 상태였다. 진보언론의 디자이너로서 보수언론의 디자이너에게 패배했다는 엉뚱한 생각조차 들었다. 자의든 타의든 난 이 사회의 정치 논리에 개입되어버린 디자이너임에는 분명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얼마 전 ‘디자인말하기’에서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얘기했다. 어떤 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그 정책과 관련된 일을 꺼려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최근 디자인서울에 반대하는 해치맨 활동을 계기로 디자인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행위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내 경우는 어떨까’ 나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이미 난 정치색에 강한 언론사에 소속되어 있다. 나는 소속된 언론을 위해 일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정치적 성향을 위해 일하는 것인가. 예전에 진보성향의 친구가 보수성향의 회사로 옮긴 적이 있다. 속으로 그 친구의 모순적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 때 난 정치적 입장이 분명한 디자이너였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물론 자신의 입장이 확고하다면 무엇을 어떻게 하든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만을 고려한다면 디자이너로서의 본질이 묻히는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만약 당신이 신문사의 디자이너라고 치자. 신문이 하루에 50만부가 인쇄된다면 당신이 만든 디자인은 하루 동안 그만큼 세상에 뿌려진다. 여기서 디자이너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일까? 정치색을 드러내기에 앞서 시각문화에 기여해야할 의무도 있지 않을까? 정치에 대한 평가는 역사의 문제지만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현재의 문제가 아닐까.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디자인을 잘하는 것. 이것 또한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천암함 그래픽도 마찬가지다. 자세가 달랐어야 했다. 디자이너로서 책임 있는 자세로 임했어야 했다. 보수언론과의 알량한 경쟁의식을 넘어 내 본연의 정보전달에 충실했어야 했다. 과연 나는 그렇게 했을까?
디자이너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반성하는 자세로 천안함을 다시 들여다본다.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을 잘해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 본다. 나는 진보언론의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그래픽 디자이너’임을 스스로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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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디자인 <9월> 에세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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