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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지기 두려운 책
Portpolio | 10/02/18 00:53
설 연휴 내려가면서 가볍게 읽을만한 책이 없을까. 겸사겸사 자주 가는 책방에 들렸다. 몇 권의 책을 찾았는데 번번히 죄송하다는 말을 들었다. 체념하고 서점 가판대 위를 천천히 둘러 보았다. 그때 가판대 위에 비닐에 싸여 조명에 빤작거리며 눈길을 끄는 책이 한권 놓여 있었다. 비닐에 동봉된 그 책은 주변의 다른 책에 비해 확실히 호기심을 자극했다.
   제목은 '디자인 생각'. 나의 성향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런 제목에 얼마나 침을 질질 흘리는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표지 디자인은 '디자인생각' 명조체로 정갈하게 배치되었고, 글자 일부를 자른 타이포그래픽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책 표지 종이질 때문인지 약간 깨져있지만 깔끔하게 배치된 ‘세상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60인’ 작은 고딕체가 이 책 내용의 수준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얇은 비닐에 동봉되어 있다. 내용 확인 불가.


   중학생 시절 참고서를 사려 서점에 종종 들렸다 몸은 참고서 가판대에 서있지만 늘 내 눈길을 끄는 잡지가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핫윈드’. 종종 친구들과 응큼한 마음으로 응큼한 곳에서 숨죽여 돌려보곤 했다. 너무 차례가 금방 끝나기 때문에 늘 아쉬웠다. 게다가 그 책은 늘 얇은 비닐로 싸여 있었고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제목, 부재에 곁들여진 이미지들은 더욱 나를 자극했다. ‘저 안에 도대체 뭐가 있을까?’ 나의 호기심과 두근거림은 극에 달했다. 마음은 마구 요동치고 충동질했다.
   아는 사람에게 들킬까 자주 가던 서점을 배신하고 으슥한 곳에 위치한 서점에 들어가 온 세상 눈치를 보며 한참을 서성였다. 용기를 내어 비닐에 싸여 있던 요놈의 앙큼한 ‘핫윈드’를 결국 품에 안았다. 방문을 몰래 잠그고 비닐을 뜯는 쾌감. 그리고 첫 장을 넘길 때의 기대감. 그리고 두 번째 장부터 급히 밀려오는 실망감. 기대감이 너무 컷 던 탓일까.


   결국 난 소유욕을 이기지 못했다. 2만원. 사실 조금 망설였다. 위대한 60인의 디자인생각을 어찌 2만원에 빗댈 수 있으랴. 순간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나의 세속적인 태도에 실망했다. 그리고 과감하게 위대한 60인의 앙큼한 생각을 구입했다. 고속버스에서 천천히 탐닉하며 비닐을 뜯을 생각으로 궁금해도 지하철에서는 꺼내지도 않았다. 서둘러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조심스레 비닐을 뜯을 생각이었다.
   '세상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60인의 디자인 생각' 과연 이 위대한 60인의 디자인 생각은 무엇일까? 결국 호기심에 가득 찬 나의 손길은 슈퍼맨이 급한 김에 옷을 냅다 찢어 제끼듯 비닐을 뜯었다.
우와! 목차에서 나는 또 한번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 목록, 목차에 몰랐던 디자이너가 반도 넘는다. 스스로의 무식함을 탄식하며 이 책이 나에게 지식과 지혜를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간략한 서문을 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읽고 본문을 펼쳤다.
   어라. 한 위대한 디자이너의 디자인생각이 4페이지다. 그림 빼면 2페이지 정도. 설마 60인의 디자인생각을 계속 이렇게 보여주는 것일까??? 내용을 읽었다. 뭔가 잘 요약된 내용이겠지 믿었다. 몇몇 잘 모르는 디자이너들을 빠르게 섭렵하며 약 20페이지 이상을 읽었다. 헉 벌써 위대한 6인의 디자인 생각을 읽었다. 마음이 조급해진 나는 내가 좀 안다고 자부 했던 빅터파파넥 펼쳤다. 제기랄. 비유하자면 파파넥코끼리에 발톱 때만도 못한다. 너무 빈약하다. 그러고 보니 첫 장의 윌리엄 모리스도 그랬다.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정말 이 출판사와 저자께서는 4페이지로 그 디자이너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차라리 '세상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60인의 디자인 사전(목록)'이 낫지 않았을까.


   난 지금 비닐에 싸여있던 비밀을 밝히고 있다. 왜냐면 그 책이 비닐에 싸여서 나를 속였기 때문이다. 이제 유독 그 책만 비닐에 싸여 있었는지 알 것도 같다. 그 서점 가판대 위에서 뽐내던 수많은 책들 중 유독 이 책이 비닐에 싸여 있었다. 이유는 두려움과 나약함이다. 책은 비닐 뒤에 숨어서 그 나약함을 드러내고 있던 것이었다. 내용이 자신 없기에 비닐을 몸에 두르고 그 안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또 속았다. 내 나약한 감정에 속았다. 돌이켜보면 나약함에 속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나약한 여자들에게, 나약한 전자제품에, 나약한 거짓정보 등에 내 피 같은 돈을 마구 쏟아 부었다. 아니 속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나약한 존재는 늘 자신을 바로 드러내지 않고 포장되어져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포장이 자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음에도 나는 늘 속았다. 나약한 껍데기에.


   어떤 의미로 이 책을 출판하셨는지, 정말 이 책을 디자이너들에게 읽게 하고 싶었는지 묻고 싶다. 처음에 책을 기획하며 과연 4페이지로 한 사람의 디자인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묻고 싶다. 자신 있었다면 왜 책을 비닐로 쌌는지 묻고 싶다. 무엇이 두려웠기에...
책을 비닐로 포장하는 모든 잡지와 출판사에 묻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추기 급급한 이들에게 묻는다. 보여 지는 것이 두려운가? 자신의 진실이 두려운가?
난 언제나 진실은 승리한다고 믿는다.
보아라! ‘핫윈드’의 최후를. 그 위대했던 'Hot wind'가 사라졌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채 쓴 ‘디자인생각’에 대한 독후감 겸 ‘디자인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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