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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내큘러 디자인(Vernacular Design) 2
Design | 10/03/14 18:43
3. 버내큘러 이해의 세 번째 단계는
1)‘디자인의 역사/계급/문화지리적 특성’의 이해와 2)‘버내큘러 디자인의 의의’를 이해하는 것이다.
일부 앞서 언급한 내용들과 겹치지만 좀더 사회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디자인의 역사/계급/문화지리적 특성’은 과거의 버내큘러와 현재의 모던사이의 갈등의 문제이다. 또 현재의 전문적 디자인과 민중 디자인의 차이를 보는 견해이다. 나아가 보편과 특수, ‘서구의 주류문화’와 ‘동양과 제3세계의 비주류 문화’를 보는 입장의 차이이다.  
근대사는 모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던은 서양의 우월주의적 발상을 기반으로 산업혁명으로 촉발되었고 그 연장선상으로 현대의 소비주의에서도 유효하게 이어진다. 서양의 우월적 문화 의식은 자신들의 과거를 포장하고 전 세계에 이를 강요함으로서 더욱 공고해 지고 있다. 동양의 문화조차 이제는 서양의 방식을 올바르다 판단하고 있으며 서양보다 훨씬 더 서양적으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치기도 한다. 모던은 이런 우월적 의식의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것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최근 들어 활발하다.
또한 디자인의 역사도 모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산업혁명, 1851년의 만국박람회를 기점으로 예술과 디자인의 갈등은 이미 촉발되었고, 사회문제와 더불어 예술의 역할을 찾는 흐름과 함께 예술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급기야 영국의 허버트리드는 예술과 디자인의 개념을 나누고 그 개념은 산업사회, 소비사회의 확산과 더불어 급격하게 확산되어 현재의 디자인에 이르렀다. 한국의 경우 디자인의 개념이 산업화와 더불어 성장되었기에 디자인의 한쪽 측면만이 강조되었고 현재 한국디자인의 주류적 개념이 산업과 모던에 기생하고 있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최근 네덜란드, 스위스 등의 이념적 차원의 디자인이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고 있고 지금까지의 산업중심의 디자인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이 보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모던의 개념이고 디자인은 여전히 모던의 지배 하에 존재한다.
윌리엄 모리스와 바우하우스의 예술 개혁의 노력은 유효하였고 전문적인 디자인분야를 창출하였지만 여전히 그들이 꿈꿔왔던 ‘민중의 미적 취양의 향상’ ‘민중의, 민중에 의한 예술 사회’는 실현시키지 못했다. 결국 귀족들의 엘리트적인 예술에서 또 다른 형태로서 부르주아의 엘리트적인 디자인을 탄생시켰다. 이 논리는 소비계급을 만들게 되었고 이 소비논리와 계급은 시장지배논리로서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다. 자본주의는 ‘모던’을 수단으로 그 지배논리를 공고히 다지고 있다. 결국 공자의 정명사상, 플라톤의 엘리트주의의 과거 귀족들의 지배논리는 현대에 이르러 ‘모던’이란 이름으로 자본가들에게 그 바톤을 넘기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모던의 본래 취지와 개념은 상실되고 지배논리로서 또 다른 개념을 형성한다.


주류가 된 모던은 또 다른 비주류의 공격을 받는다.
세계화, 지구촌 이라는 미명하에 전 세계가 하나의 국가로 가는 허황된 꿈은 이제 완전히 경쟁의 개념아래 무너졌다. 차별성, 경쟁력은 이제 이 사회를 대변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이런 측면에서 버내큘러 디자인은 다시금 조망 받고 있고 자신들의 버내큘러를 통해 차별성을 찾고 경쟁력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기에 현대의 전문적인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버내큘러의 속성에서 전문적인 요소들을 뽑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미 언급했던 ‘버내큘러의 전유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잘 아는 피카소도 ‘아비뇽의 여인들’이 아프리카 문화의 관심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다른 지역의 버내큘러가 역으로 작용해 주류의 현실로 잘 반영된 사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피카소는 아프리카의 토속적 문화를 통해 미술계의 주류를 바꾸었다. 현대의 모든 디자인은 버내큘러를 통해 이런 획기적 성과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한다. 서구의 주류는 급속히 제3세계의 비주류 문화를 흡수하여 또 다른 주류논리를 형성하고 있다. 반면 근대의 모던은 또 다른 버내큘러이기도 하다. 맥도널드의 간판, 스타벅스는 이미 지구촌 버내큘러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든 주류와 비류주의 대립은 결국 또 다른 주류를 형성하는데 이것은 결국 항상 주류에 서 있던 자들의 승리로 매듭지어 진다. ‘디자인말하기’에서 이지원 선생은 이제 비주류는 사실상 사라졌다는 표현을 자주한다. 이미 우리가 말하는 비주류는 주류에 흡수되어 주류를 강화하는 논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질적인 버내큘러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이해하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실질적인 버내큘러적 특성은 ‘아마존의 눈물’에서 보는 비문명화 된 지역 외에는 그다지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 않을까 여겨진다.
디자인의 예를 들어 최근 유행하는 DIY 디자인을 얘기하며 디자인의 변화를 얘기하지만 이 또한 전문적 디자인의 틀을 벗어나기 힘들다. DIY 또한 전문적인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 안에서 민중의 디자인을 찾기는 힘들다.
‘디자인의 역사/계급/문화지리’에서의 버내큘러는 이미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모던의 공고함이 지속되고 있고, 계급은 더욱 단단해지고 문화지리적 특성은 인간의 기술로 인해 희석되고 있다. 버내큘러가 고개를 들자 자본은 모든 문화에서 버내큘러를 활용하며 팔아먹기 위한 수단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이렇듯 엘리트(전문)적인 현대 모던의 우월성은 소비주의와 결합되어 계속 진화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불평등은 모던의 기본정신에 이미 위배되었고 모던니스트들이 주장하던 합리성은 이미 자본의 논리로 폄하되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던의 권위는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짓누른다.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던 간에 우리는 과거 모던의 본래의미로 회귀하거나 모던의 딱지를 떼어내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을 느낀다. 불만은 쌓여간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변화를 꿈꾸고 있다. 예술과 디자인에서 변화의 요구는 포스트모던, 버내큘러 디자인, 그린 디자인 등 많은 용어들을 통해 여러 가지 용어로서 대변된다. 이들의 개념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지만 현재가 잘못되어 있다는 점은 공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 느끼고 공유해 가는 과정이다.
최범 선생님은 하류문화(비주류)가 상류문화(주류)로 도입된 사례로서 펑크스타일, 청바지 등을 언급하셨다. 이것은 하류문화도 그 자체로 우월할 수 있다는 사례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항의 표현이 표출된 것이고 이것을 모두가 공감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버내큘러 디자인의 의의’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최번 선생님이 ‘버내큘러 디자인의 의의’에서 키워드로 제시한 ‘자생성’ ‘주체성’ ‘생태성’ ‘지속가능성’ ‘민중과 지배계급의 교류’ 등은 현대의 공고한 모던에 대항하여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할 키워드들이 아닐까 싶다. 주류화를 꿈꾸는 비주류가 아닌, 즉 상대적인 개념이 아닌 비주류 자체로서의 자존심과 자존감, 이것을 지키려는 의지, 이것이 버내큘러의 존재 의미로서 이해했다.


처음 이글을 시작하면서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를 언급했다. 그 군밤장수는 살기위해 글씨를 표현했고 자신을 표현했다. 주변의 어떤 것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자신 있게 표현했고 그것을 드러냈다. 자부심까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만들었고 떳떳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장일순 선생님은 그 자체를 보았던 것이 아닐까.
버내큘러, 국가적 이상일 수도 있고 지방의 경쟁력일수도 있다. 나아가 개인의 꿈일 수도 있다. 이 꿈은 결코 주변과의 경쟁력이나 차별성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개인의 자존심,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의 길을 묵묵히 나가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버내큘러를 달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어떤 것과 비교된 버내큘러가 아닌 그 자체로 아름다운 버내큘러, 버내큘러 디자인이 훌륭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개인 스스로 미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주체성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사회, 정치, 예술적 관점들을 보면 이제 이 버내큘러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공동체의식, 개인존중, 민중예술은 모두 버내큘러라는 단어로 이해할 수 있음을 알았다. 강의 처음 최범 선생님은 버내큘러를 통해 현대디자인을 조망하고 조감도를 활용될 수 있다고 언급하셨다. 이에 공감한다. 물론 잠깐의 강의를 통해 버내큘러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좁디 좁았던 시야가 조금은 밝아진 기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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