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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읽기 비판 - 지식의 권위
Life | 10/06/24 02:04
디자인읽기 비판 - 지식을 버려라


이 글의 시작은 언젠가부터 어설픈 지식을 무턱대고 내보이며 무식을 드러내던 내 자신을 인식하면서부터이다. 지금의 나와 앞으로의 나와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자아비판이자 자아성찰이다. 또한 이 글은 디자인읽기 게시판에 대한 비판일수도 있고 나랑 비슷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 나아가 이 사회의 알량한 지식꾼들 혹은 대단히 전문적인 학식을 가진 분들에게 대한 항변일수도 있다.


권위
최근 이 사회가 가장 울분을 토하는 것이 무엇인가? 4대강, 세종시, 미디어법 등 사회적 이슈와 함께 TK(대구, 경북)세력의 부활, 검찰, 경찰 등 공권력의 부활, 재벌의 지나친 권력화의 문제들이 아닌가. 이것은 권력과 권위의 부활이다.
21세기 새로운 미디어와 새로운 세대가 속속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모두 소통을 통해 많은 문제들을 진단하고 해결을 모색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도층들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권력과 권위에 목매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관점의 차이는 균형을 잡아가지 못하고 마치 서로 다른 세상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 사회의 소통의 부재에서 온다. 누가 소통을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 사회의 소통은 많은 부분 단절되어 있다. 소통의 단절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특히 권위에서 오는 소통 단절의 문제가 심각하다. 권위는 단순히 대통령 등의 지도층 권력에서 형님 동생으로 나누는 일상까지 광범위하게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권위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학벌이나 외모, 돈, 지위 등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만남이 있는 모든 장소에서 이 권위는 소통의 상하를 구분하고 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을 시작으로 민주정권이 시작되었다. 그간 오랜 권력의 핵심이었던 ‘하나회’ 군부권력의 척결을 시작으로 1998년 김대중 정권, 2003년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한국 사회의 수많은 권력들을 해체해 왔다. 이 과정은 피비린내 나는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투쟁이었다.
수많은 권력들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던 지배계급들은 점차 대중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탈 권위의 상징이었다. 실제로 노무현의 정치적 행보는 서민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권위의 굴레를 벗는 시늉이라도 보여줌으로서 억압당하는 대중들에게 폭발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의 탈 권위는 실패하였다. 그는 소통을 위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고질적인 한국 사회의 권위는 철옹성이었다. 그의 시도는 많은 사회적 갈등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 만큼 권위의 문제는 동방예의지국이 안고 있는 양날의 칼이다.
탈 권위의 실패 원인중 하나가 식민지 근성이다. 일제시대 아니 훨씬 이전부터 우리 사회는 식민지 근성을 가지고 있었고, 일제시대와 군부정권을 거치며 식민지 근성은 극대화 되었었다. 전세계에 유래없는 대통령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은 예전의 왕조를 방불게 하고 공권력은 지도계급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버젓이 사용되기도 한다. 민주화, 부패, 독재 등을 방지하기 위한 독립적인 기관조차도 식민지 근성이 투철하다. 권위 위에 권위, 귄위 아래 귄위는 이 사회에 수많은 층을 형성하고 있다. 어쩌면 현대 사회의 본질은 권위 획득을 위한 시소게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권위와 소통
권위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국가라는 존재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그 실상은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힘을 과시함으로서 국가라는 존재가 실제하고 있기도 하다. 공권력이란 어쩌면 다양한 대중들 모두를 보호하기란 애초에 무리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국가라는 틀 속에서 국가가 제시하는 가치를 충실히 따른다. 감히 국가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 가족, 부모님,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 사회는 또 다시 독재로 점철될 것이 불보 듯 뻔했다.
386으로 대표되었던 이 사회의 선배들은 이런 상황을 일치감치 인식했다. 압축성장 속에서도 그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그들은 조직되었고 훌륭한 리더를 두었다. 그리고 그들은 권위에 대항했다. 소통을 주장했고 많은 성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세대는 그 성과를 지켜보며 성장했다.
결국 국가와 국민이 공존을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이다. 그 소통은 아래로부터의 소통이다.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대중들과 소통하며 지배계급에 그 의견을 전한다. 지배계급은 소통을 통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녹치 않다. 성과를 이룬 386세대의 몇몇의 그들 자신들의 성취를 무기로 또 다른 권위를 만들었다. 권위가 세분화되고 새로운 권위가 등장했다. 정치권을 포함해서 각 계층별, 각 전문가 집단별 소통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입장만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생각만 얘기하려들뿐이다. 권위를 바탕으로 둔 소통은 무용지물이다. 같은 한국말을 쓰면서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문화 권력은 또 다른 형태의 권위를 만들고 수많은 대중들을 무식하다고 치부하기까지 한다. 문화는 대중에서부터 나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문화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
이런 현실에서 무슨 제대로 된 소통을 바라겠는가. 서로 떠들고만 있을 뿐이다. 권위는 둘째치더라도 상대방이 말할 때는 내가 할말만을 생각하고 있다. 소통이 막혀 소통에 대한 예의마저도 상실되고 있는 것이다. 새와 개가 얘기하고 있는 모습니다.


소통의 장벽, 지식
정치의 본질이 ‘갈등-대화-타협-해결’임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을 올곧이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신의 이익만을 대변할 뿐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전무하다. 집단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은 모두 서민들을 위한다는 거짓 공약을 앞세우고 소통을 주장하면서도 소통을 무시하고 있다. 소통의 장애는 정치권의 문제만은 아니다.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은 너무 많다. 개인적인 문제, 전문가의 문제, 사회계급상의 문제, 나이의 문제, 지식의 격차, 학벌의 문제 등등 이 사회에서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다. 많은 소통 장애 요인 중 이미 사회적으로 합법화된 권위에 입각한 소통의 장애는 사실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우리가 소통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 자신부터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집어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일상에서 소통을 가로막는 '지식'의 문제를 꺼내려고 한다.
학교를 다니고 배웠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적 권위가 되었다. 배움은 글이나 말을 통해서 주장한다. 글이나 말은 배움의 실천이다. 배움의 실천이 바로 소통이다. 우리는 배움을 지식으로 전달한다. 배움을 지식으로 전달할 때 은연중에 귄위가 생긴다.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지식에 의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이 자세가 우리의 소통을 가로 막은 주요 원인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위대한 사상가의 입을 빌려 얘기하길 좋아한다. 혹은 자신의 논리가 빈약하다 여길 때는 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고 하며 자신의 논리를 합리화 한다. 너는 그런 책을 읽지 않았고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가정한다. 유식을 무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의 빈약함을 포장한다.
무엇인가를 이해함에 위대한 사상가나 유명인에게 영향을 받는 것은 일반적이다. 근데 어쩌란 말인가? 나도 내 친구한테 부모님한테 옆의 동료한테 항상 영향을 받고 있다. 그들과의 관계와 대화를 통해 상당한 이해를 하고 현실을 깨닫기도 한다. 각자가 수많은 매체와 상황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자각 하는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같은 이해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배운 이해는 사상가에게 배운 것에 항상 아래에 위치한다.
위대한 사상가나 유명인에게 배운 것은 근거 있는 것이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배운 것은 근거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이 상황은 좀 아이러니 하다. 물론 사상가나 유명인들은 어떤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이 사회에 뿌린 것은 존경을 표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이 시대 혹은 우리 주변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위대한 사람들도 당신들의 사회가 있었고 당신들이 시대가 있었다. 즉, 그들만의 시대정신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시대에 맞는 최적의 논평을 한 것이다. 이것이 시대를 넘어 역사가 되었다. 그들의 사상은 글을 통해 전달되고, 그들의 시대에 빗대 현재 상황을 진단하는 근거가 되어왔다.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반면, 이 시대에 같은 상황에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거울이다. 주변을 보고 대화하고 배우고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 자아를 형성해간다. 이것 또한 상당히 가치 있는 것이다. 위대한 철학가와 내 친구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머뭇거린다.
누구의 입이 더 소중하냐를 따지면 우위를 비교하기 어렵지 않은가? 혹시 내 친구의 조언이 사상가의 글보다 더 소중하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이 글을 읽기를 멈춰도 좋다.


지식과 권위
그렇지 않다면… 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사상가의 글이 내 주변의 조언 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소통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스스로 소통을 단절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엄청난 다층적이고 다각도의 권위를 형성하고 있다. 탈 권위의 중요성을 강변하면서도 스스로 그 권위를 누리려 발버둥치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권위가 바로 학교이다.
학교의 권위는 바로 배웠다는 권위이다. 자신이 뭘 배웠고 그것을 배우지 않는 너는 바보라고 치부해버리는 아주 알량한 권위이다. 이 알량한 권위가 우리 사회 저변의 소통을 엄청나게 단절시키고 있다.
디자인읽기도 마찬가지의 측면에서 돌아보고 각성해야할 필요가 있다. 처음 디자인읽기가 시작되고 디자인읽기가 재수 없다라는 의견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디자인읽기에 올라오는 글의 논리 보다는 논리를 위해 인용하는 그 과정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은 디자인읽기를 외면하는 사람들을 다수 만들었다.
나는 디자인읽기 초기 멤버이다. 이 게시판에서 디자이너에게 소중한 이슈들이 얼마나 많이 제시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순수하게 고민하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 짐작한다. 이런 소중한 목소리들이 재수 없다고 치부되고 있다. 혹은 표현이 진부하고 어설프다고 질책하는 목소리도 많다. 한탄할 일이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몇몇은 당시의 상황을 진단하고 극복하기 위해 자성하는 비판의 글도 있었다. 게시판을 통한 소통의 문제를 반성한 것이다.
나아가 ‘디자인말하기’라는 모임도 만들었다. 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목소리로 전달하면 더욱 소통이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그만큼 재수 없다고 평가받은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재수 없다’ 무엇이 재수 없다는 것인가? 나는 그 원인을 ‘지식’으로 진단한다. 지식 그 자체가 아닌 지식의 사용이 문제이다. 즉, 지식을 통해 이해를 논리화 시키는 과정이 문제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이해를 지식 아래에 두는 것 그 자세가 문제이다.

학교의 권위는 바로 지식의 권위로 연결된다. 우리는 수많은 권위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유독 지식의 권위에는 관대하다. 지식의 권위에 맞닥트리면 먼저 피하려 든다. 자신의 이해나 경험에 의한 생각 따위는 천하다고 느끼고 있다. 지식은 단순히 텍스트이고 어쩌면 이 시대에는 맞지도 않는 옛 이야기일지도 모르는데 유명한 사상가가 뭐라고 했다고 하면 고개부터 숙인다.
물론 지식은 좋은 것이다. 지식은 우리 사회의 자양분이고 지혜를 얻기 위한 과정이다. 지식을 통해 역사적으로 많은 것들이 소통되었고 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과학지식은 우리 생활을 엄청나게 변화시켰으며 사회지식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점을 진단하고 역사적 과오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경고한다. 인문지식은 자아를 성찰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나아가 모든 지식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도 한다. 지식은 이렇게 우리 삶과 직결된 문제이다.
지식 자체는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다.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식을 남용함으로 소통을 막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인생의 상당기간을 학교에서 그 지식이란 놈에 의해서 계급을 매겨져 왔기 때문이다. 지식을 가지고 성적을 매기고 그곳에서 계급을 맛보았다. 지식이란 놈한테 테러를 당했다. 한번 당한 것은 오래간다. 지식이란 놈한테 당한 강간을 늘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대학 수업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교수님들은 샤르트르니 니체니 노자니 온갖 인용을 하면서 그분들의 지식을 뽐내시고 퇴장하신다. 학생들은 멍하니 앉아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공책에 끄적된 흔적만을 남길 뿐이다. 공대로 가보자 미분 적분 열역학 전자기학 등등 온갖 수식으로 가득한 문제들을 그 원리도 모른 채 계산기를 두드리며 부단히 애를 쓴다. 나도 공대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곱셈조차 내 손으로 못하고 계산기에 의존하는 의존형 인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어느 교수님 하나 왜 이렇게 되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강의가 중요하다고 하고 학교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결국은 모든 이해는 학생에게 맡겼다. 어떤 측면에서는 맞는 것이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지식만을 말했을 뿐 이해를 시키려 노력하지 않았다. 교수님들의 소통은 최소한 나에게는 성공하지 못했다.
TV나 사회에서 하는 강의를 보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유식함을 아주 절묘하게 뽐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다 아는 것인데 유창한 언변과 수많은 인용으로 그 당연한 사실을 엄청나게 대단한 것으로 포장한다. 그래서 그것은 나의 문제가 아닌 별나라의 문제로 인식하기도 한다. 훌륭한 강사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감동으로 풀어내고 적절하게 지식을 활용하여 청중들에게 이해를 주고 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분들은 지식 뽐내기에 그친다.
정치인들은 어떤가? 수많은 공약을 꺼내놓고 숫자를 들이대고 국민들을 팔아가면서 알 수 없는 말들만 되풀이한다. 그 말들 중 대부분은 서민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진짜 서민을 위한 것인지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선거 기간을 제외하고는 소통을 위한 노력은 없다.
책을 펼쳐보자. 온갖 인용구와 외래어, 전문용어, 어려운 철학용어 등으로 도배된 책들은 첫줄만 읽어도 토할 지경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어렵게 쓸까 고민하고 쓴 흔적이 역력하다.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유식한지 뽐내려는 것 같다. 책을 보고 늘 좌절한다. 책은 나에게 이해를 전달하기 보다는 나의 무식함을 일깨워주는 수단인 듯 하다.


지식의 권위에 의한 소통의 좌절
매일매일 우리는 소통의 좌절 속에서 살고 있다. 이 좌절은 우리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있다. 스스로 소통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지식들을 무기로 서로가 소통을 하기 보다는 서로의 주장만을 하고 있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강연장에서 책상에서 심지어 커피숍, 술자리까지 우리는 온갖 어려운 말과 지식으로 무장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기려고 애쓴다.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정말 참담하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냐고 되묻고 싶다. 당신은 무엇을 이해했고 그 이해를 삶에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그 대답은 여전히 공허한 울림만으로 되돌아올 뿐 여전히 모호하다.

‘지식을 버려라’ 이런 글을 쓰면서 인용을 하는 무리수를 띄우는 것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자는 이런 말을 했다. "고기를 잡으면 어망은 쓸모없는 것이다" 이 말은 이해를 했으면 그것을 이해하게 된 글이나 말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 한다 "이해만을 가지고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 그대로 이 글의 목적이자 취지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사건, 사람과 부딪치면서 많은 것을 이해하면서 살고 있다. 한 사람 보는 경험과 관점은 한정되어 있다. 한 사람은 한 사람만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 중요하다. 한 사람 한사람의 이해가 교환되면서 우리의 경험과 관점은 확장되고 이 사회는 그만큼 성숙되어 간다.
문제는 이해가 교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그 이해를 자꾸 지식으로 포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지식으로 포장되면 자신의 이해가 훨씬 더 논리를 획득하고 의도를 잘 전달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다.
모두가 그러니 모두가 소통이 안 되고 있다. 지식을 내안에 넣었으면 내안에서 소화된 언어로 표현해야 소통이 된다. 지식 그 자체는 소통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글이건 말이건 어떤 것을 인용한다면 그 인용에 대한 분명한 자신의 논리를 밝히고 이해를 전개해야 한다. 지식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이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단순한 앵무새로 전락하는 것이다.


지식의 권위를 버려라
이 시대의 소통은 서로의 이해를 나누고 같이 고민하는 것이다. 지식을 나누는 것은 지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 빛을 바랄 뿐이다. 일상에서 혹은 어떤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는 글이나 말에서는 지식 자체보다는 지식이 빚은 지혜와 이해(깨달음)가 훨씬 중요하다.
이 글의 제목, ‘지식을 버려라’는 지식을 얻는 것을 무시하거나 게을리 하라는 뜻이 아니다. 지식은 자신의 이해와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무척 중요한 수단이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른 수단일수도 있다. 하지만 깨달음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식에 얽매이면 깨달음 즉 이해를 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소통은 이해에 이르는 또 하나의 빠른 길이다. 지식을 습득하고 소통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식에 얽매이면 소통을 가로 막는다. 이 둘이 조화가 되어야 한다. 서로 상극이 되면 곤란하다.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나의 의견을 정말 전달하고 싶다면 가장 아래로 가야한다. 권위에 의존해 의견을 전달하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힘들다. 의견을 전달받는 사람이 가슴으로 그 의견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해가 아닌 지식으로서의 소통은 일방통행만을 남길 뿐이다. 우리는 과감히 ‘지식의 권위’를 버리고 겸손한 소통을 택해야 한다.
어쨌든 최근 나는 지식의 권위가 상당한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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