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최근 글을 잘 못쓰게 된 원인이 이건 아닐까...
[고미숙의 行설水설]논술의 함정 혹은 아이러니
올해도 어김없이 입시의 계절이 돌아왔다. 수능이 끝났으니 이제 수험생들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각개약진 중일 터, 그 가운데 가장 힘겨운 과정은 다름아닌 논술일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논술학원들은 이미 만원사례라고 한다. 수능과 논술, 말하자면 이 두 가지가 우리 시대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통과의례’인 셈이다. 논술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독서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라 할 수 있으니, 교육의 방향은 크게 독서와 글쓰기로 압축될 수 있겠다.
그래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일찌감치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온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노릇이다. 이 정도로 ‘범국민적’ 노력이 투입되었으면 대학생들의 수준이 대폭 향상되어야 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요즘 대학생들은 단군 이래! 가장 책을 읽지 않고, 유사 이래! 가장 글쓰기를 못한다. 아니, ‘책을 통한 인생의 탐구’라는 발상 자체가 없을뿐더러, 또 지성의 광장에서 글쓰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 어릴 때부터 받아온 그 많은 교육적 배려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좀 심하게 말하면, 지난 20여년간 시행된 교육개혁 성과는 ‘다 골고루’ 못하는 ‘하향평준화’를 이룬 것뿐이라고 하면 너무 지나친 풍자일까?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독서와 논술을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어진 문제에 답하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남이 제출한 문제를 푸는 ‘대상’에서 스스로 문제를 던지는 ‘주체’가 되는 것,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기주도적’ 학습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기주도적이란 말 그대로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핵심은 ‘신체성’이다. 신체가 지닌 잠재력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가가 평가의 척도라 할 수 있다. 우리 몸에는 35억년 생명의 역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이 기억들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활용하느냐, 여기에 따라 개별주체와 사회의 운명이 달라진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이 힘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교육시스템이나 사교육, 미디어 등은 하나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 외부적 조건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면 거꾸로 ‘신체성’은 침묵해버린다. 이것이 존재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가역반응’이다. 결국 자기주도적 학습 시스템이 강화될수록 자기주도성을 잃어버리는 역설이 일어나게 되는 것.
지금 교육이 바로 이런 함정에 빠진 듯하다. 독서력이란 책에 대한 욕망과 능력을 말하는데, 학생들은 이 힘을 기르는 데 주력하는 게 아니라, 책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는 데 골몰한다. 논술 또한 마찬가지다. 글이란 모름지기 내 존재의 심연에서 터져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한테 논술은 정보의 조합이나 이미지의 짜깁기일 뿐이다. 그러니까 수많은 책을 읽고, 수없이 글을 써대는데도 바로 이 ‘자기’ 혹은 ‘신체성’이라고 하는 영역은 한번도 일깨워진 적이 없는 것이다. 자기주도적인 것조차 이미지가 되고 정보가 되는 시대, 범람하는 정보의 늪에서 모두가 정보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이 정보화 사회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주도적 신체성을 일깨워주는 멋진 프로그램이 없느냐고? 오 마이 갓!
누군가 말했다. 문체는 얼굴이라고. 과연 그렇다. 성형만능시대라 모든 얼굴이 닮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문체도 점점 똑같아질 수밖에. 성형이 만개할수록 얼굴의 개성이 사라지듯, 독서지도를 받으면 받을수록 책에 대한 욕망이 증발하고, 논술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글쓰기 능력이 마모되어 버리는, 그리하여 자기주도는커녕 마치 물귀신작전처럼 다함께 ‘자기망각’의 늪으로 잠겨버리는, 아! 이 끔찍한 아이러니를 대체 어찌한단 말인가?
출처 : http://news.kh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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